안녕하세요 요리하는 강아지 입니다 :) 와인을 이야기 할때 항상 등장하는 필록세라 라는 진드기 이야기와 금주법 이야기가 있죠
위스키의 역사를 이야기 할때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인데요
금주법은 어쩌다 시작되었는지 금주법이 와인에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필록세라는 왜 그토록 와인의 역사에서 큰 영향을주었으며 아직도 끝임없이 언급되는지 알아보도록 해요
지금의 와인이 있기까지 역사속 와인의 이야기들을 해볼게요
오늘도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래요
필록세라
필록세라 ,와인에 엄청난 타격을 줬던 진드기인 필록세라는 작은 노란색 진딧물로 포도나무 뿌리에 기생하며 오직 포도나무만을 공격하는데요
아메리카 대륙에 서식하다가 19세기 미국 포도 종을 수입하면서 유럽에 함께 들어왔어요
이미 면역력이 있던 미국 토착 품종에는 큰 타격이 없었지만 유럽 포도 품종에는 매우 치명적이었죠
필록세라는 순식간에 유럽 포도밭을 황폐화 시켰어요
프랑스 가르 지방의 포도나무들이 병에 걸려 죽기 시작했고 이후 병은 빠른 속도로 퍼져 프랑스 포도농가의 과반수 이상이 피해를 입게 되었어요
이 병으로 인해 20년동안 유럽의 포도농가와 와이너리는 큰 위기에 빠지게 되었죠
이 진드기는 포도나무 뿌리를 공격해 약화시키고 몇주 만에 포도나무를 말라죽게 만들어요
프랑스의 경우만 해도 1875년에 와인생산량이 8450만 헥토리터 였지만 필록세라가 프랑스 전역에 퍼진 뒤인 1889년생산량은 70%가 급감해 2340만 헥토리터 정도였어요
1873년 미국인 과학자 찰스 밸런타인 라일리의 연구에서 면역력이 있는 미국 포도 종 뿌리를 유럽 포도 종에 접목 하는방법을 생각해냈는데요
접목이 사실 그리 쉬운일은 아니였어요
수많은 미국 포도 품종 가운데 어떤 품종이 필록세라에 저항력이 강한지 찾아야 했고 그 미국 포도 품종이 유럽 포도 품종과 잘 접목이 되어야 했으며 석회질 토양에 잘 적응하는 개체 여야 했죠
미국의 포도 재배학자 토머스 볼니 먼슨은 그이 연구로 필록세라를 마침내 정복할수 있게 되었죠
1880년에 바탕나무를 이용한 접붙이기 방식이 포도농가에 널리 보급되면서 포도 농업이 새 출발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오늘날 전 세계 거의 모든 포도나무는 접붙이기를 한 나무들 인데요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현지에서 발생하는 병충해에 강한 품종이나 아예 해충이 살지 못하는 모래흙에서 자라는 포도나무가 바탕나무로 사용되요
토머스 볼니 먼슨은 이 공로로 1888년 프랑스 정부로 부터 기사 훈장을 받았는데요
미국인으로서는 과학자 토머스 에디슨에 이어 두번째 였죠
필록세라가 유럽에 퍼진 지 거의 20년만에 발견된 해결법이었는데요
이미 황폐화된 포도밭을 되살리는데는 너무 큰 비용과 노력이 필요했어요
필록세라가 아예 없어진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것은 아니지만 면역력을 가진 뿌리를 접목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리 치명적이지는 않죠
칠레의 경우 아르헨티나와의 경계가 높은 아주 높은 안데스산맥 으로 가로막혀 있고 다른면은 모두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던 덕분에 고립된 지리적 위치가 필록세라를 피해 갈 수 있었어요
또한 필록세라는 모래 토양에서는 살아남지 못해 모래 비율이 높은 포도밭들은 필록세라의 공격에서 안전할 수 있었죠
금주운동, 금주법
19세기와 20세기 초 금주운동이 계속해서 이어졌는데요
18세기 영국에서 특히 빈민층 사이에서 증류주인 진의 소비가 늘었고 진에 취한 이들로 인해 심각한 사회문제가 발생 했어요
부르주아층은 진 음용을 제한하자는 계몽운동을 펼쳤고 금주운동은 와인이나 맥주가 아닌 알콜 도수가 높은 스피리츠를타깃으로 시작 되었죠
산업혁명과 맞물려 과하게 술에 취한 노동자들이 기계를 다루다 다치고 큰 문제를 일으키는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 하기시작했어요
알콜 도수가 높은 술을 마시는것을 자제하자는 운동은 미국 대륙에서도 이어졌고 1830년에 이르면서 절대금주주의 라는 운동이 일어났고 전과는 다르게 과도한 알콜섭취를 자제하자 가 아닌 그 어떤 술도 마시면 안된다가 되버렸죠
알콜도수가 높은 증류주 뿐아니라 맥주나 와인까지도 금주 범위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1833년 영국 프레스턴에서 시작된 절대 금주주의 운동은 전국으로 퍼졌고 미국까지 영향을 주었죠
당시 노동자의 무지와 빈곤은 술에서 왔다는 인식이 생겼고 고용주들은 노동자의 음주 습관을 싫어하고 두려워하기 까지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었어요
1838년에는 가톨릭 금주운동이 영국에서 크게 일어나기도 했고 1840년에는 미국에서도 본격적으로 금주운동이 일어났어요
알콜중독을 벗어나기 위한 사적 모임 및 금주 켐페인, 미국금주협회의 활동, 기독청년회와 같이 종교와 연결된 움직임 또한 나타났죠
1861년~1865년에는 남북전쟁으로 금주운동이 살짝 주춤하였고 1869년 금주당이 창당되고 1874년 여성기독교금주협회가 만들어지면서 금주운동이 다시 급물살을 탔어요
14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금주법은 엄청난 부작용을 낳으며 끝이났죠
주세를 거두지 못한 정부는 재정난을 겪어야 했고 각종 포도, 밀, 보리, 감자, 옥수수 같은 술의 밑재료가 되는 농업또한큰 타격을 입었어요
와인이 이미 문화의 큰 부분을 차지했던 나라들은 오랜시간을 마셔오던 것을 단순히 금지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였죠
금주법 덕에 미국의 마피와 같은 갱단은 승승장구했고 정부와 유착 관계로 부정부패를 저질렀어요
대공황의 혼란 속 1933년 취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금주법을 폐지 하며 막을 내리게 되었어요
와인병의 변화
와인을 보관하는데 사용됬던 용기들은 신석기시대 토기나 고대 암포라가 있는데요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산소 차단이 완벽하지 않았던 단점들이 있었어요
산소를 완전히 차단해 와인이 산화되지 않도록 보관할 수가 없었죠
17세기 이전까지 유리는 무척 얇고 깨지기 쉬워 보관과 운송에 사용하기가 쉽지 않았는데요
유리는 1700도에 달하는 높은 화력에 모래를 녹여 만드는데 과거에는 나무를 썼지만 석탄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화력이 강해져 훨씬 두껍고 무겁고 단단한 유리를 만들 수 있게 되었어요
와인병은 과거에는 바닥 쪽이 유리를 부는 모양 대로 만들어져 뚱뚱하고 동그랗게 제조되었어요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현재 우리가 아는 길쭉한 형태로 바뀌었죠
1740년대에 이르러 현재와 흡사한원기둥 모양을 가지게 되었어요
유리기술의 발달로 틀을 이용해 일정한 모양과 용량의 병을 대량 생산 할 수 있게 되었고 와인을 보관하고 운송하기에 좋은 튼튼하고 안정적인 용량과 모양까지 좋은 와인병이 만들어 지게 되었죠
펜으로 유리병에 와인 정보를 기재 하거나 종이를 붙였었는데요
19세기 이르러 현재와 같은 프린트된 라벨을 유리병에 붙이는 식으로 발전하게 되었어요
여러 역경을 이겨내고 지금의 와인이 있기까지의 이야기를 해보았는데요
지금처럼 다양한 술을 우리가 즐길 수 있는건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발전해 나간 세계의 역사와도 연관이 깊어요
지금의 와인을 있게 해준 모든 이에게 감사를 전하며 요리하는 강아지 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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